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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고려의 전쟁사 (요나라, 서경, 압록강)

by lifechecking 2025.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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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과 고려의 전쟁사

 

고려시대는 외세의 침입이 빈번했던 시기로, 그중에서도 거란과의 세 차례 전쟁은 고려의 자주성과 국가 정체성을 지켜낸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었습니다. 요나라로 불린 거란과의 충돌은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닌 동북아 전체 국제정세와 밀접하게 연관된 정치·외교·군사적 갈등으로 비칩니다. 고려는 중국 대륙의 송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이를 경계한 거란은 고려에 대한 압박과 침공을 감행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요나라와의 전쟁 배경, 서경과 압록강의 전략적 중요성 등을 중심으로 고려의 생존 전략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요나라의 부상과 고려와의 충돌 (요나라)

요나라는 거란족이 10세기 초반에 세운 국가로, 907년 당나라가 멸망한 후 중원과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빠르게 세력을 확장한 나라입니다. 이들은 만주와 몽골 일대를 장악하며 북방 유목민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송나라와 대립하고, 고려에 대해서도 강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와 요나라의 첫 공식 충돌은 993년으로, 요나라의 장수 소손녕이 이끄는 8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침입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거란은 고려에 대해 송나라와 단절하고 자신들과의 조공관계를 맺을 것을 요구했습니다.

 

당시 고려는 국방력에 있어 거란에 비해 열세였지만, 서희라는 뛰어난 외교관을 통해 전면전을 피하고 외교 담판을 이끌어내는 쾌거를 이뤄냈습니다. 서희는 거란과의 대화에서 고려가 본래 고구려의 계승 국가이며, 거란의 침입은 불필요한 전쟁을 야기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결국 서희는 전쟁 없이 동북 9성이라는 전략적 영토를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전례 없는 외교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승리는 잠정적일 뿐이었습니다. 이후 1010년, 현종이 즉위한 고려에서는 김치양 등의 실권자 제거가 있었고, 이를 핑계로 거란은 2차 침입을 다시 한 번 강행합니다. 이번엔 개경까지 함락되었으나 고려는 끝까지 저항했고, 거란은 장기전의 불리함을 인지해 퇴각했습니다. 1018년에는 마지막 3차 침입이 있었으며, 강감찬 장군이 귀주대첩에서 대승을 거두며 거란의 침략 의지를 꺾었습니다. 귀주대첩은 고려가 군사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 큰 의미를 가진 전투였습니다.

 

이러한 전쟁들은 단순히 국경 방어가 아닌 고려의 정체성과 생존을 건 싸움이었고, 이후 고려는 자주 외교를 기반으로 한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강화하기 시작합니다. 거란과의 전쟁은 이후 고려가 여진과 몽골 등 북방 민족에 맞설 때도 중요한 교훈과 기반이 되어준 역사전 사건이었습니다.

전략 요충지 ‘서경’의 의미 (서경)

서경은 현재의 평양 지역으로, 고려시대에는 군사적·정치적·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거란과의 전쟁이 진행되던 시기에 서경은 국경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군사적 요충지로 활용되었습니다. 2차 거란 침입 때 요나라 군은 개경까지 진격한 뒤 후퇴하면서 서경을 경유했으며, 이 지역에서 고려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고려 정부는 서경을 북방 방어의 핵심 거점으로 지정하고 병력과 물자를 집중적으로 배치해 전략 강화를 도모했습니다.

 

서경은 단지 군사적 거점뿐 아니라 정치적 상징성도 강했습니다. 고려는 서경을 '부도(副都)'로 삼아 개경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로 인정했고, 일부 국왕은 서경에서 즉위하거나 정무를 집행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고려가 단일 중심 도시가 아닌 다중 거점 체제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이례적인 정치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북방 민족의 지속적인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서경을 강화하는 것은 국방 전략 차원에서도 필수적이었습니다.

 

또한 서경은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평양에 위치한 만큼, 고려는 스스로 고구려의 계승자라는 인식을 내세우기 위해 서경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서희의 외교에도 반영되어 있었으며, 고구려의 후예로서 고려가 만주까지 세력 범위를 확장할 수 있는 정당성을 주장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을 거치며 서경은 단순히 전략적 거점이 아니라, 고려의 정치적 자존심이자 역사적 정통성을 드러내는 핵심 지역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후에도 서경은 무신정권, 원 간섭기 등을 거치면서도 북방 방어의 전진기지로 지속적인 역할을 수행해 주었습니다.

압록강을 둘러싼 전략적 긴장 (압록강)

압록강은 고려와 요나라 사이의 분쟁에서 핵심적인 군사·외교 지점이었습니다. 압록강 일대는 고구려 멸망 이후 수세기 동안 중국과 한반도 북부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했으며, 고려시대에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방어선으로 기능했습니다. 특히 1차 거란 침입 이후 서희가 외교적으로 확보한 동북 9성은 모두 압록강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었습니다. 이들 지역은 거란의 남하를 견제하는 방어 거점이자 고려의 북방 진출을 상징하는 중요한 영토였습니다.

 

하지만 동북 9성은 산악지대가 많고 병참 유지가 어려웠기 때문에, 고려 내부에서도 유지가 어렵다는 평가가 많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고려는 거란과의 외교 협상 과정에서 이 지역을 거란에 다시 반환하는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양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전면전을 피하고 국력을 내부적으로 축적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습니다.

 

압록강은 이후에도 고려의 군사 전략에서 빠질 수 없는 핵심 지역이었습니다. 여진의 부상과 더불어 압록강 방어선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윤관 장군이 별무반을 조직하고 북방으로 진출할 때도 이 지역을 중요 거점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몽골과의 전쟁 당시에도 압록강은 초기 방어선이 되었고, 이후 강화도 천도 전까지 고려는 북방 방어를 위해 압록강 주변에 수비대를 집중 배치했습니다.

 

압록강은 단순한 자연 경계선을 넘어, 고려의 국가 정체성·외교 전략·군사력 집중의 상징으로 작용했습니다. 고려가 이 지역을 어떻게 관리하고 대응했는지는 동북아 국제질서 속에서 한반도가 어떻게 생존하고 자주성을 유지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오늘날에도 압록강은 북한과 중국의 경계로 여전히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가지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외교 및 군사 전략은 현대 한반도의 국방 개념에 많은 시사점을 선사해 줍니다.

 

거란과 고려의 전쟁은 단순한 과거의 무력 충돌이 아닙니다. 이는 고려가 국제정세 속에서 어떻게 자주성을 지켜내고, 군사적·외교적 역량을 통해 국가의 존립을 이어갔는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역사적 사례입니다. 서희의 외교, 강감찬의 군사 승리, 서경과 압록강의 전략적 운용은 오늘날에도 참고할 만한 지혜입니다. 이 글을 통해 고려와 거란의 대립이 단지 전투의 연속이 아닌, 역동적인 외교전이자 전략의 역사였다는 점을 이해하고 간직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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