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의 창업자인 왕건은 한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습니다. 특히 수험 한국사에서 ‘후삼국 통일’과 ‘고려 건국’ 파트는 필수 암기 항목이기 때문에 왕건의 생애에 대한 정리는 필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왕건은 877년 송악(현 개성)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 왕륭(왕융)은 해상 무역과 토지 경영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호족이었습니다. 그의 가문은 단순한 지방 세력에 그치지 않고, 정치와 경제 양면에서 송악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집안이었습니다. 이처럼 왕건은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환경에서 성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지역 주민들의 큰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무예를 함께 익히며 장차 지도자로 성장할 준비를 차근차근해나갔습니다. 특히 해상 무역에 익숙해진 환경은 후에 그가 해상 작전에서 뛰어난 전략을 구사하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후고구려, 후백제, 신라의 삼국이 각축을 벌이던 혼란의 시대였으며, 지방 호족들은 각자의 세력을 키우며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왕건의 정치 활동과 고려 건국
왕건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등장한 것은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궁예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민심을 얻어 후고구려를 세우고 자신을 미륵불이라 칭하며 강력한 왕권을 추진했다. 왕건은 궁예의 신임을 받으며 해상 작전과 군사 정벌에 참여하였고, 그 공으로 벽상삼한사라는 높은 벼슬을 받는다. 그러나 궁예는 점차 폭정과 의심이 심해졌고, 측근들을 숙청하며 민심을 잃었다. 918년 왕건은 신하들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한다. 이로써 후고구려는 고려로 바뀌며, 왕건은 초대 태조에 오르게 된다.
후삼국 통일과 정치 전략
고려 건국 이후 왕건은 후백제의 견훤, 신라의 경순왕과 외교 및 전쟁 전략을 병행하며 통일 전쟁을 시작합니다. 왕건은 후백제와의 치열한 대립 속에서도 군사뿐만 아니라 외교적으로도 매우 유연하게 대응 했습니다. 특히 각 지역 호족들과 혼인 동맹을 맺어 그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전략은 고려가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신라 왕실과도 연대를 모색하며 명분 싸움에서도 우위를 점하려 했습니다. 927년 공산 전투에서 후백제에 일시적으로 패배했으나, 왕건은 좌절하지 않고 전열을 재정비합니다. 이후 930년 고창 전투에서 후백제군을 크게 무찌르며 전세를 역전시켰고, 이후 각지의 호족 세력을 포섭하며 점차 세를 넓혀갔습니다. 935년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은 왕건에게 항복하며 신라는 흡수되고, 936년 후백제까지 멸망시켜 후삼국을 완전하게 통일합니다.
왕건의 통치 철학과 훈요십조
통일 이후 왕건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기보다는 지방 호족들과의 권력 균형을 유지하며 안정적인 연합 정치를 지향했습니다. 그는 각 지역의 대표 호족들을 왕실과 혼인으로 엮었고, 이로써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며 체제 안정에 성공합니다. 또한 불교를 국교로 삼고, 사찰을 지원하며 민심을 얻는 데 집중합니다.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닌, 정치 안정과 왕권 강화를 위한 사상적 도구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수도는 개경(송악)으로 정하고, 행정 체계를 정비하며 국가 기반을 정립했습니다. 그는 후대 왕들에게 통치 철학을 남기기 위해 ‘훈요십조’를 유언으로 함께 남깁니다. 이 훈요십조는 통치자가 지켜야 할 열 가지 원칙으로, 불교 숭상, 풍수지리 중시, 연호 사용, 도적 금지 등 고려인으로서 지켜야 할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특히 풍수지리를 중시한 것은 개경을 수도로 삼는 결정과도 연결되며, 고려가 장기 집권할 수 있는 정치 철학의 기반이 되어주었습니다.
왕건의 죽음과 역사적 의미
왕건은 말년에 이르러 후계 구도를 정비하고, 각 지역의 질서 유지를 위한 명령을 내리는 등 고려 왕조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인자하고 신중한 군주로 기억되며, 현실적인 정치와 이상적인 통치가 조화를 이루는 정치를 펼쳤습니다.
고려의 초대 왕이었던 왕건은 943년, 67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고려는 그의 정책 기조를 이어가며 왕권을 점차 강화해나갔습니다. 왕건은 복잡한 시대 상황 속에서 통합의 상징으로 평가되며, 고려 초기의 기틀을 완성한 군주로서 한국사 교육에서 반드시 다루어지는 중요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한국사 시험에서 왕건은 반드시 출제되는 인물로, 출생 배경, 고려 건국, 후삼국 통일 과정, 훈요십조, 지방 통치 전략 등 핵심 포인트를 흐름 중심으로 숙지해야 합니다. 특히 그의 리더십과 정치적 감각은 단편적인 암기가 아닌, 스토리로 기억하는 것이 수험 전략상 매우 효과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왕건의 생애는 통일의 필요성과 시대의 요청을 민감하게 읽고 이를 실현한 모범적인 사례이며, 한반도 중세사의 흐름을 이해하는 핵심 인물입니다.